(사진자료: 윤 ** 의 글 캡처)
요즘 진중문고에 대한 SNS 매체에서 찬·반 열기가 뜨겁다. 아래의 글은 8월 22일 SNS에 올라 온 윤 ** 씨의 글이다. 윤 씨는 이 서적이 6.25를 직접경험하지 않은 군복무 중인 청년들에게 참전용사의 경험담을 알려주는 것이 왜 나쁜 일인지 알수 없다 하면서 이는 명백한 잘못이며, 전)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려는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래는 SNS에 올라온 윤**씨의 글 전문이다.
[삼선 이야기] 국방 진중문고, 사문난적의 길로 들어서다. 2025.8.22.
국방부는 진중문고 도서로 선정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 전쟁 이야기』 도서를 1억 2천만 원 예산으로 9,948권을 구매 배포한 책 전량을 회수하여 폐기 처분하는 만용의 칼을 빼 들었다. 이는 전형적인 21세기 사문난적으로 이재명 정부의 역사관에 어긋나는 도서를 난적(亂賊)으로 몰아 입막음하려는 짓이다.
“농지개혁은 신분제를 없애고, 자유와 평등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다.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발판삼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고,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중략) 그런데 신기하게도 8월 16일 당일엔 구름이 썩 걷혔고 융단 폭격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4일부터 사흘간 낙동강 방어 구국기도회를 열어 날씨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본 도서 p.47, 87)
이재명 정부가 “농지개혁은 1894년 발생했고, 구국 기도와 날씨는 전혀 인과관계가 없다.”고 쌍심지를 켜고 저격한 문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과 6·25전쟁 낙동강 전투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아야 대한민국 건국의 비밀을 풀 수 있다.
역사학자 E. H. 카(Carr)는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라 했고, 윈스턴 처칠은 “더 길게 되돌아볼수록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고 했으며, 키신저는 “역사는 국가의 기억”이라 했다. 모두 팩트를 잘게 쪼개어 사슬처럼 엮여 있는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미래를 알고자 함이다.
조선은 1894년 갑오경장을 통하여 신분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하부구조의 개혁이 없어 여전히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에 얽매여 살았다. 명목적 신분제와 실질적 신분제다. 전태일의 청계천 분신자살은 놀랍게도 “근로기준법대로 대우해달라”는 절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지개혁은 자신의 토지가 없는 소작농에게 실질적 신분제를 없애는 행위였다.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미스터리 한 부분이 독립군의 규모였다.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의 인구는 대략 1,300만 명에서 2,500만 명으로 증가했음에도, 독립군 숫자는 여전히 500~1,500명 미만이었다. 이는 ‘독립’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미군정을 끝낸 2년 만에 발생한 6·25전쟁에서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개전 초기부터 낙동강 전투까지 무려 7만 명이 희생되었다. 왜 이들이 이를 악물고 조국을 위해 싸웠는가? 그토록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군’이 되기를 주저한 민족이 2년 만에 놀라운 반전을 맞이했다. 이는 바로 미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철수하지 않고 ‘사생결단’으로 맞선 이유가 되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은 국군, 그들에게 코리아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징집병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소작농의 아들들, 그들이 인민군을 위해 총을 거꾸로 드는 행위는 단 한 군데도 발생하지 않았다.
낙동강 전투의 승리를 위해 대통령이 구국기도회를 열었다고 시비를 건다면, 조선사 실록에서 기우제를 지낸 임금을 모두 삭제해야 하고, 기복 신앙을 하는 교회와 사찰을 모두 없애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힘들면 기도하고, 마음이 어지러우면 절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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