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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義士)의 애국혼(愛國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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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애재(嗚呼哀哉)라, 침략의 원흉(元兇)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狙擊) 처단(處斷)한 만고(萬古)의 애국지사(愛國志士)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를 무도(無道)한 일본관리들이 ‘테러리스트’로 폄훼(貶毁)하더니, 이 나라 국회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투척(投擲)한 망동(妄動)을 벌인 자(者)가 감히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처단(處斷)하고 순국(殉國)한 안 의사의 숭고(崇高)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유훈(遺訓)을 더럽히도다!」

 

3월 26일은 104년 전 안중근 의사가 중국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일제(日帝)의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저격한 후 일제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 31세의 일기(一期)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존경 받는 저명한 항일의사

 

중국은 지난해 11월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대변인을 통해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존경 받는 저명한 항일의사(抗日義士)"라고 했고, 지난 1월 19일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에 ‘安重根义士纪念館(안중근의사기념관)’을 개관했다. 항일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안 의사의 의거(義擧)를 기념하고자 기념관을 설립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안 의사를 "일본의 초대총리(初代總理)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며 중국측에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당시 중국 청(淸)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는 안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아래와 같은 시(詩)를 지었다.

 

平生營事只今畢 (평생영사지금필: 평생을 벼르던 일이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사지도생비장부: 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도다)

身在三韓名萬國 (신재삼한명만국: 삼한 땅에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도다)

生無百世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주도했던 쑨원(孫文 손문)도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기리는 아래와 같은 예송시(禮訟詩)를 지었고, 장제스(蔣介石 장개석)도 안 의사의 장례에 추모의 글(輓章 만장)을 써서 보냈다.

 

功蓋三韓名萬國 (공개삼한명만국: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生無百歲死千秋 (생무백세사천추: 살아서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 년을 살리라)

弱國罪人强國相 (약국죄인강국상: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나)

縱然易地亦藤候 (종연역지역등후: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고 보면 이등 역시 죄인이라)

 

진정한 애국영웅 안중근 의사의 운명적 발자취

 

우리는 어떤가? 우리 정부는 1962년 안중근 의사에게 건국훈장(建國勳章)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을 추서(追敍)했다. 이순신 장군이 호국영웅(護國英雄)이라면 안중근 의사는 진정한 애국영웅(愛國英雄)이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 국민 대다수는 안 의사의 의거(義擧) 사실 외에 안 의사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안 의사 의거 현장에 기념관을 설립한 금년 안 의사 ‘순국(殉國)의 달(月)’에 기하여 안 의사의 참모습과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道理)일 것이다.

 

안중근(1879. 9. 2~1910. 3. 26)은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현감(縣監)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進士) 안태훈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1895년 천주교학교에서 가톨릭신부에게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그 후 안 의사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된 것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 의사는 부친의 유지(遺志)를 따라 육영사업(育英事業)을 통해 국권(國權) 회복에 나서고자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로 이주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고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는 등 인재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의병(義兵)에 가담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손가락을 끊어 죽음으로써 구국투쟁(救國鬪爭)을 벌일 것을 맹세한 후, 그 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안 의사는 뤼순(旅順) 감옥에 갇혀 단 일주일에 걸친 6회의 공판을 끝으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3월 26일 처형(處刑)되었다.

 

애국의 길에는 어머니의 민족혼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적 삶의 이면(裏面)에는 아들만큼이나 의연(毅然)하고 애국심이 투철했던 어머니의 위대한 민족혼(民族魂)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1907년 안중근이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을 때 “최후까지 남자스럽게 싸우라”고 격려했으며, 같은 해 나라의 주권(主權) 회복을 위해 벌였던 전국적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자신과 안 의사 가족의 모든 패물을 헌납(獻納)했다. 안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뒤에는 아래와 같은 결연(決然)한 편지와 함께 명주 수의(壽衣)를 보냈고, 안 의사는 그 수의를 입고 의연하게 순국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抗訴)를 한다면, 그건 일제(日帝)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再會)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天父)의 아들이 돼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아들의 순국 후 조 마리아 여사는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 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했다. 안 의사는 자식의 죽음을 목전(目前)에 두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대의(大義)를 받들어 남아(男兒)답게 용감히 죽음을 맞으라”며 수의를 지어준 어머니의 민족혼(民族魂)을 이어받아 민족의 영웅으로 당당히 살다 간 것이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나는 반만년의 우리 조국과 2천만 우리 동포를 위해 동방대국(東邦大國)의 평화를 교란하는 간악한 적을 죽였으니, 나의 목적은 이와 같이 바르고 크다.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일이니 아무 한(恨)이 없다. 나의 염원(念願)은 오직 조국 대한의 독립뿐이다.”라고 일갈(一喝)했으며, 사형선고를 받은 후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안 지 이미 오래다. 내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치 않으니 상고를 포기한다.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며 당당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10일 감옥으로 면회를 간 두 동생에게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시체는 조국이 독립되기 전에 반장(返葬)하지 말고 하얼빈 공원 부근에 매장하여 세계 망국민(亡國民)들의 계감(戒鑑)이 되게 하라.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독립과 자유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大韓獨立)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처형을 앞두고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언도 남겼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에서 죽노니, 우리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實業)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遺恨)이 없겠노라.”

 

‘爲國獻身’(위국헌신) 실천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안중근 의사는 일제(日帝)에 분연(奮然)히 맞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바친 애국지사(愛國志士)일 뿐 아니라, 교육자이자 동양평화를 주창(主唱)한 사상가(思想家)였다. 출중한 필체로 많은 유묵(遺墨)을 남기기도 한 안 의사는 중국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한ㆍ중ㆍ일 3국간 동양평화회의 설치,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공동평화군 창설 등 현재의 유럽연합(EU)과 유사한 진취적 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던 중에 처형당했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안 의사의 의거(義擧)는 독립투쟁 이상의 우리 민족의 민족혼(民族魂)이자 우리 국민의 애국혼(愛國魂)의 상징이다.

 

한일합병(韓日合倂) 막바지로 치닫던 정국(政局)에 이토 히로부미 피격(被擊)으로 궁지에 몰린 이완용을 위시한 매국친일파들은 일제(日帝)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울 장춘단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각 차원의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안 의사의 의거(義擧)를 불의로 규정하고 일제에 사죄했고, 태황제 고종(太皇帝 高宗)도 통감관저(統監官邸)로 가서 자신의 왕위를 박탈한 자(者)의 죽음을 애도했다. 안 의사 순국 5개월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강압(强壓)으로 체결한 “합병조약(合倂條約)”을 공포(公布)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일제에 편입시켰다(‘庚戌國恥’). 이로써 안 의사의 애국거사는 불의로 규정된 채 일제 강점(强占) 36년을 거치며 그 의의(意義)는 역사의 뒤편으로 묻혔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정연한 논리와 당당한 태도로 조목조목 진술함으로써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을 탄복(歎服)시켰다. 그의 진술에 감복(感服)한 일본인 관선변호인은 “그 범죄의 동기는 지식 결핍과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했다.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안 의사를 경호, 감시했던 간수(看守)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그의 고결한 인품과 식견에 감복하여 일본으로 귀국 후 안 의사가 써준 유묵(遺墨)(“爲國獻身軍人本分”)과 안 의사 사진을 걸어 놓고 부부가 평생 동안 안 의사를 기리며 합장(合掌)했고, 치바 도시치 사후에는 안 의사 유묵을 그대로 새겨 넣은 묘비가 세워졌다. 그가 보관했던 안 의사 유묵 원본은 유족을 통해 그의 고향 미야기현(宮城縣)의 다이린사(大林寺)에 보존되어 있다가 198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이린사 정원(庭園)에는 안 의사 유묵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그를 보고 ‘테러리스트’라니?

 

이러한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다니, 일본이 ‘테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테러’란 이념적, 종족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 맹신자(盲信者)나 맹종자(盲從者)들이나 그들에게 고용된 자들이 나름대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고(無故)한 대중을 상대로 조직적, 집단적으로 자행하는 파괴, 살상, 폭행 등의 만행(蠻行)을 말한다.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 參謀中將)으로서 나라를 침탈(侵奪)한 적국(敵國)의 괴수(魁首)를 처단(處斷)한 애국의거(愛國義擧)이다.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폄하(貶下)하는 일본의 망언은 자신들의 역사적 만행을 부정, 은폐하고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광기(狂氣)의 한 단면일 뿐이다.

 

역사교과서와 역사교육의 좌편향 논란으로 소란스런 요즘의 우리 상황이 대변하듯, 잘못된 역사교육이 이 나라 정체성(正體性)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나라의 정체성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 사회에서 “안중근 의사가 어느 병원 무슨 과(科) 의사(醫師)냐?”는 농담마저 떠돌고 있으니, 이 나라의 미래가 어디를 향하는 것인가?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철영 객원논설위원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전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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