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형 작
우리 동네 호수공원을 산책하다 호수를 바라보며 무심히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세상을 살다보면 몇 번인가 발 끝에 밟히고,
소매 끝에 스치는 인연이 닿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몇 번인가 넘어지기도 하고,
몇 번인가는 발 끝에 채이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그러다 보면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가슴 한쪽에 훵하니
가을 같은 바람만 스치운다.
숨소리조차 들리는 오솔길을 홀로 걸으며 숲속 벤치에 앉아
바스락 낙엽이 구르는 소리에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기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숲이 그냥 내게로 온다.
구름이 내게로 오고, 그리움도 내게로 온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겨우내 마른가지에 싹이 움트던 지난 봄,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던 빗소리.
내리쬐던 불볕도 마다 않고 지켜내던 지난 여름,
내 안의 상처를 감싸안은 시원한 강바람.
자기의 모든 열정을 태워 열매를 맺는 가을,
추억을 흔들던 억새풀과 노을빛.
이렇게 하늘이 높은 가을날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를
낙엽에 담아 내게 보내 준다면 그래서 내가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 타는 냄새를 좋아하는 당신, 가을 바람이 날 당신에게
데려다 준다면 가을을 잔에 타서 전하고 싶다.
그리고 맑은 가을날 가을 햇살이 쏱아지는 들판에
누런 곡식이 춤을 추는데, 빨간 고추 잠자리를 잡으러 들로
나가자고 내 손을 잡고 달려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것이 고요 속에 묻혀있는 시간, 숲은 소리를
빨아들인 체 그냥 묵묵부답인데, 단지 개울가의 물소리만
적막을 깰 뿐이다.
인생 길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급하게 지나치며 달려온 삶, 덧없는 세월......
어느듯 땅거미가 한숨처럼 내려앉는 저녁,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 그리고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라 해도
그것들이 얼마나 빨리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 버리는가?
인생은 정확한 문제도, 해답도 없으며,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게 인생길을 걷다, 바람이 나에게 향하면
왜 내 마음 깊은 곳에 이런 파문이 일으나는 걸까?
마음 속에 남아있는 억새풀처럼 모질게 휘청이며
하고 싶은 말을 가슴 깊이 숨긴 체, 숨죽이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지?
비원 부용정 연못위에 노랗고 빨간 단풍잎의 조화
그 위에 몰래 숨긴 내 마음이 색색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는지?
비 온 뒤 호수 위에 걸린 무지개를 말하지 못하고 햇빛이
나온 뒤 몰래 꺼내보다 들켜버린 내 마음을 보셨는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가슴에 흔들리는 사랑처럼,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기억 속만 헤집다 저물어 가는 가을날,
산책길을 걸으며 썼다가 지우는 상념의 시간을 자연의 하나처럼
남김없이 비움으로써 가득해지는 평온함이 내게로 다가온다.